일제시대 두레 조직 와해

두레의 와해 의의

두레의 해산은 대동놀이 집단의 주체로서 두레 생산농민의 공동체 의식의 약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두레풍물 자체의 견고성과 지속성을 약화하여 단절을 야기했다. 이러한 단절은 두레의 사회경제적 원인 말고도 일제에 의한 민족문화 말살정책에 의해 강화되었다. 일제는 마을 공동체의 단결심, 귀속감 등을 고취시키는 집단놀이를 말살하려 하였다. 


두레는 조선 후기의 사회경제사적 요구와 향촌사회의 변화에 부응하여 선진 농법인 이앙법의 확산에 기여하였고 마을 공동체 문화로 정착되었다. 두레의 성장은 조선 후기 민중의 힘이 성장한 것을 반영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같은 두레는 일제시대에 들어와 화폐경제의 확산과 제국주의 통치로 인해 소멸하고 말았고 그 결과 풍물굿과 노동요는 노동에서 유리되었고, 마을 공동체 문화의 건강한 자산을 잃게되었다.


대동놀이 말살

일제에 의해 말살된 대동 놀이의 예시로는 차전, 장치기, 횃불싸움, 줄다리기, 지신밟기, 놋다리, 석전 등이 있다. 일제는 생산주체로서의 대중의 대동놀이 중 진취적이고 투쟁정신, 집단의식, 동족의식 등을 고취할 수 있는 놀이들을 일체 말살시키고자 한 것이다. 물적 기반의 분해와 더불어 농민 신분층에 분해라는 이중고를 감수해야 했던 두레의 주체(농민)는 더 이상 이 대동놀이를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문화로 승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점은 자주적·주체적 문화를 전승시키고자 하는 농민들의 노력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내재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생산주체로서의 대중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두레의 소멸 시기 및 양상


두레의 소멸시기와 그 양상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 초기무렵 조선 사회는 화폐경제체제로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마을 공동체의 약화는 두레의 존립을 어렵게하고 이 과정에서 두레는 점차 소멸하다가 일제 말기를 지나며 거의 완전하게 소멸이 된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 까지 약 10년간에 8할 이상에 해당하는 두레가 소멸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약 20%정도의 두레는 그 명맥으 이어오다가 이농 및 제초제 등장을 기점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두레 소멸의 원인

두레 소멸의 원인은 크게 8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두레를 통해 자연스럽게 결집하는 민중들을 억압하고자 일제가 두레 소멸을 주도하였다. 둘째, 일제 말기 징병, 징용제가 실시되면서 농촌에 일할 사람들이 점차 사라졌다. 셋째, 일제 말기 악기 공출로 풍물이 희귀해졌다. 넷째, 일제 말기 공동작업반 운영으로 두레의 필요성이 감소했다. 다섯째, 진흥회가 두레의 자율성을 악화시켰다. 여섯째, 한국 전쟁으로 농촌이 점차 파괴되고 인구가 피난 등으로 이동하면서 공동체가 약화되고 인심이 각박해져 두레 문화를 약화하였다. 일곱째, 190년대 이후 이농으로 인해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희귀해지면서 노동력이 약화되었다. 여덟번째, 1970년대에 들어와 제초제가 보급화되면서 두레가 소멸했다.


이러한 원인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일제 말기의 전쟁준비, 한국전쟁으로 인한 격동, 산업화 등으로 인한 이농과 농약사용 등이 두레의 소멸을 가속화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성의 약화가 두레를 소멸하는데 가장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레 소멸의 영향 및 결과

두레의 소멸은 무엇보다 노동과 놀이의 소외라는 비인간화로 나타난다. 노동의 신성성이나 그 상징성이 와해되며 집단문화의식도 약화되었다. 노동주체의 자기노동에 대한 긍정, 자긍심 등은 생산력의 발전의 질적 요인이었고 또 노동집단의 집단적 상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의 소멸은 노동 주체들의 공동체성을 와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행위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레 소멸 이후 더 이상 공동체적 의식에 기반한 집단노동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이는 문화적 소외현상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농악의 뜻 및 구성 :: 가장녀 포수 등


예전에는 농악을 농악이라 하지 않고 풍물이나 풍장이라고 불렀다. 녹악에는 풍악을 울리는 악기를 지니고 앞장서서 다니는 농악수와 뒤에  따라다니면서 흥을 돋구고 장난을 치는 잡색, 뒤치배가 있었다. 농악수의 솜씨도 솜씨지만 잡색과 뒤치배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했다. 양반이 정자관을 쓰고 잡색 중 먼저 나서서 엉성한 춤을 추고 무동이라 하여 여자복장을 한 아이가 뒤따르는데 장정의 어깨 위에 올라가서 손을 펼치며 무용수 역할을 한다.


그 다음에는 기장녀가 뒤따른다. 기장녀는 여장남자로 머리에 수근을 쓰고 얼굴에는 연지곤지를 찍고 노란 저고리에 파란 치마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어서 포수가 망태를 어깨에 걸치고 꿩털을 한 묶음 만들어 목 뒷덜미에 세우고 한 손에는 나무총을 들고 사냥꾼 노릇을 하였다. 



전에는 두레를 할 때 농기를 논가에 꽂아놓고 신하게 일하고 신나게 논 후 점심 때가 되면 소동패가 특유의 북소리를 울려 이제 그만하고 밥먹으러 가자는 것을 알렸다. 그러면 어른들은 다시 농악을 울리며 동네로 들어와 밥을 먹었다. 농번기에 농촌은 점심때나 해질때나 농악이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침에 논에 갈 때 아랫 마을도 농기를 들고가고 윗마을도 농기를 들고 나가다가 마주치면 이 두레패끼리 길에서 서로 길을 비키라고 야단을 했다고 한다. 선봉인 기수끼리 깃대 밀기로 싸움을 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이 기싸움이다. 


농악의 기원을 들자면 옛 삼국시대, 그 이전의 부여와 옥저, 예와 삼한, 단군 시대의 제천의식이 바로 그것이라 할 수 있다. 농사를 마치고 술 먹고 춤추고 무리지어서 잘 놀았다고 할 때 지금 우리 민족이 노는 가락을 보아서 그 때에 이미 농악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농악은 타악기 중심이기에 또 소리가 멀리까지 울리며 흥을 돋우기에 이 추측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근세 조선말기 고종황제와 대원군은 농악을 좋아하여 경복궁을 재 건축 할 때도 팔도 농악패를 데려다가 놀려서 일꾼을 위로하고 토목공사가 잘 성사되기를 기원했다. 여기에서도 국가적인 차원의 기복행사 자격이 농악에 있음을 알 수 있다. 



품앗이 의미 의의 역사 :: 상부상조의 미덕


내가 참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가 품앗이라는 말이다. 품앗이는 농어촌에서 일이 바쁠 때 오늘은 내가 이웃집 일을 해주고 다음번엔 이웃이 우리집 일을 도와주는 노동의 교환을 뜻한다. 농번기와 같이 일손이 딸리는 시기는 누구나 바쁘기 때문에 시기를 정하여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생긴 풍습이 아닌가 싶다. 


1. 품앗이라는 단어의 유래, 의미

품앗이라는 말의 내력을 살펴보도록 하자. '품'이란 하루 노동하는 노동력과 그 양을 말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노력한 보람이 있는가를 판단할 때 "품값"이라는 표현을 쓴다. 또한 노동력을 투입한다는 의미로 "품을 들인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사람은 일을 하고 산다. 이 일은 하루단위로 정할 때 계량화 할 수 있다. 즉 품은 한 사람의 하루 노동력인데 앗이란 무엇인가? 이 앗이는 빼앗다, 차지한다는 듯이다. 또는 갚음의 의미이다. 내가 오늘 이웃의 일을 해주었으니 내일 우리집 일을 해 달라면 내 몫을 차지한 것이기 때문에 앗이가 되는 것이다. 이 앗이는 차등이 없이 1:1의 노동력 교환 효과를 갖기 때문에 결국은 빼앗는 것인데 어감상 도로 갚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2. 품앗이의 의의


이와 마찬가지로 품을 주고 받는 교환을 말은 앗이라고 하면서도 기쁨으로 받아들이다는 것은 아름다운 우리 풍습이다. 빼아고 차지하는 것이 사실은 주고 받는 것이라는 미덕의 전환이 있기에 나는 이말이 참 좋다. 품앗이는 돈을 따지는 타산이 앞서는 것이 아니다. 돈으로 계산하는 삯이라면 굳이 품앗이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전 농촌에서는 노동력은 있으되 돈이 피차 없었기 때문에 이 노동력인 품이 교환가치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사람마다 노동력의 가치가 과연 같았을까? 남자와 여자의 노동력 차이, 어른과 아이, 노인간의 노동력 차이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사람대신 소를 쓸 수도 있고. 물론 차등이 있었을것이나 대부분 1:1의 교환으로 쳤다고 한다. 원칙적으로 품앗이는 인간의 노동력은 대등하다는 평등사상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우울증의 여러 증상 : 분노, 일 중독

 

현대인들은 상당한 피로와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겪는 일이 잦습니다. 내 주변만해도 단순한 우울감이 아니라 병명으로써의 우울증을 겪어본 친구들이 여럿인데요. 이러한 우울증은 단순한 우울감 뿐만 아니라 무기력, 집중력 저하, 만성 피로 등으로 이어져 일상생활에도 어려움을 초래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분이 우울한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 우울증이라고 생각하지만, 우울 장애는 의학적으로 진단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우울감이 아니라 수면 패턴이나 식욕의 변화까지 야기하는데요. 미국 성인 인구의 약 6.7 %에 해당하는 약 14.8백만명이 매년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하니 그 수치가 무시할만한 수치는 아니죠. 우울증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 유형, 기간, 정도가 원인에 따라 다양한 증상을 나타냅니다. 오늘은 대표적인 우울증의 두 가지 증상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분노

우리는 종종 분노를 우울한 상태로 인식하지 않기도 합니다. 분노가 순간적으로 화가 난 상태일 수도 있지만, 우울증의 증상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끊임 없는 분노 상태에 놓여있다면, 끝도 없이 화가 난다면 우울증의 증상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연구는 우울증을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혹은 내면에 대한 분노로 정의하기도 합니다. 정상적인 수준 이상의 분노를 보인다면 우울증 상담을 받아봐야 할 것 같네요. 분노를 조절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은 뇌의 신경전달 물질 밸런스가 깨져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특히 변연계와 대뇌피질 간의 교류에 이상이 있을 때 분노 문제가 생긴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우울은 슬픔이 아니라 분노를 동반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워커홀릭, 일 중독

 

우울한 사람들은 종종 일 중독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인생이나 환경보다는 자신이 컨트롤 할 수 있는 일에 몰입하게 됩니다. 다른 것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아 일에만 몰두했던 경험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확실히 건강한 정신상태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과도하게 일에 몰두하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한번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일 중독은 우울증의 증상이기도 하지만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노르웨이의 한 연구에 따르면 일에만 빠져 있는 사람들이 ADHD나 강박증, 분노조절장애, 우울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게 될 확률이 높다는 결과를 냈습니다. 또한 워커홀릭 자체가 일종의 정신질환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우울증은 실제로 매년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갑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가수 구하라, 설리, 종현님이 우울증으로 자살을 선택했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우울증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울증이 올바르게 진단되고 치료 될 때조차도, 사람들은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울증은 멘탈이 약해서 걸린다던가, 예민해서 그렇다던가 단정지어버리는 경우가 많죠. 우울증의 유형이 얼마나 다양하고 증상이 얼마나 광범위한지를 이해할 때 우리는 우울증에 효과적이고 안전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진두레놀이] 공동노동과 놀이의 결합


두레풍장의 편성


두레에는 반드시 풍장이 딸렸다. 두레풍장, 장풍장으로 불리는 풍장굿은 일반거인 풍물굿과는 달랐다. 노동에 편하게끔 간편하게 조직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첫째, 농기와 영기를 앞세우고 꽹과리, 징, 북, 장고의 사물과 소고가 딸렸다. 사물은 필수나 소고는 상황에 따라 선택적이었으며 농사일에 번잡스럽다고 소고를 쓰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법고는 3법고, 6법고 정도가 원칙이었다. 돌리는 경우와 안돌리는 경우로 나뉘었다. 모든 두레에 나발은 필수였다. 호적은 장풍장에서는 쓰지 않았다. 둘째, 초벌, 두벌과 만두레의 풍장굿은 당연히 차이가 났다. 만두레굿을 치게되면 우선 치배가 늘어나고 무동을 태우는 식으로 놀이가 가미되었다. 일반적 의미에서의 판굿은 두레풍장과는 구분된다.


대부분의 두레패들은 들에 나갈 때 질굿을 치고 김매기에서는 쇠를 치지 않거나 치더라도 판굿 그 밖에 다른 굿에서 치는 것을 그대로 치기 때문에 두레음악과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두레 음악이 독자적인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김제, 부안, 정읍, 고창, 영광 같은 호남 서부지방에 한해서 두레풍장이라고 김맬 때 쇠가락이 별도로 있어 왔다. 셋째, 두레풍장의 악기편성은 10명을 넘는 경우가 드물었다. 두레총원 30여명 중 10명 미만이 풍장을 쳤다. 사물 4인, 법고 3인을 포함해도 7인 규모였다. 그러나 농기4인(1인은 기잡이, 3인은 줄잡이), 영기 2인을 포함하면 10인이 넘었다. 넷째, 두레는 풍물을 치기 위한 역할분담과 더불어 풍물을 운영하기 위한 조직도 지녔다. 아래의 경우 좌상, 영좌 같은 조직과 더불어 풍물만을 위한 조직체계가 정연하게 서 있었다.


두레의 조직과 회의


조직과 회의는 두레를 가능케하는 원동력이었다. 민주적인 조직관행과 회의방식은 두레의 평등성을 보장하였으며, 두레가 마을에서 강력한 힘을 지니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두레는 자연마을을 기반으로 조직하였다. 자연마을에서 1개의 두레가 조직되는 것이 보편적이므로, 두레발생이 촌락의 발달과 더불어 나왔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고있다. 두레의 노동력 동원방식은 강제성을 지녔다. 강제성은 두레의 공동체성을 뜻하였고, 강제성이 약화되면서 두레도 사라졌다. 두레는 민주적인 회의체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두레를 하기전에 열리는 사전회의와 두레가 끝나고서 열리는 결산회의가 있었다. 


1) 두레의 조직


두레 조직권역 기본형은 자연마을 단위이며, 이의 확장형은 여러마을이 묶인 형태의 합두레다. 현지조사 자료에 의하면, 거개의 마을두레들이 1개 자연마을을 단위로 하는 자기 완결적인 조직관성을 지닌다. 여기서 조선후기의 리,동,촌의 정황을 두레조직에 비추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 처음 형성된 자연마을의 경우, 마을 규모가 작았기에 이웃마을과 합하여 두레를 형성하였을 것이나 인구증가에 따라 차츰 자연촌의 확대발전이 이루어짐으로써 자연마을 단위로 독자적인 조직화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자연마을을 벗어나서 지역적인 연합체로 결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두레는 원칙적으로 1개 자연마을 단위로 조직되는 것이 상례인 탓이다. 합두레로 작업을 하는 경우에도, 각각 마을마다 소규모 두레를 자체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것이 상례이며, 합두레시에도 각자 마을두레가 대열을 지어 작업을 하고 난 다음 다시금 각자 마을 두레로 돌아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경우에 합두레는 연인원 100명 이상의 대규모 조직을 의미했다.


마을이 지나치게 커서 1개의 단독두레로 묶을 경우, 능률이 오르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몇 개의 두레로 나누어 짠다. 소규모 두레로 나누어 작업을 하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될 경우에 해당되며, 마을에 따라서는 두레꾼 숫자가 많더라고 한번에 두레를 내는 경우도 많다.


2) 두레의 회의


(1) 두레농사 전의 회의


두레농사 전의 회의는 실제적 농사준비를 시작하는 예비모임이다. 무엇보다 두레 재조직 및 역원선출, 경지순서 결정, 두레셈 기본원칙, 농악기 보수 및 구입, 악기연습 따위가 이루어졌다. 볏가리 뉘이기, 농가고사 따위의 의례와 놀이가 곁들여졌다.


회의명칭은 '두레공론', '두레공사', '김매기모임', '김매기회의', '두레짜기', '질짜기' 등 다양하다. 현지조사에 의하면, 두레짜기가 보편적이다. 그러나 두레짜기 같은 관용어 성격의 명칭뿐 아니라 두레공론, 두레공사 따위도 명칭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의 장소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달랐는데 모내기 이후의 더운 철에 열리는 회의는 시원한 나무그늘(정자나무)이 쓰였다. 마을의 유력한 집의 큰 사랑방도 악기보관, 집회장소 따위로 활용되었으며 일제시대로 들어와서 행정책인 구장집도 모임처로 활용되었다.


(2) 두레농사 후의 회의

두레농사 후에 하는 회의는 결산모임이다. 김매기를 종료하고, 음력 칠월 칠석이나 백중을 전후하여 호미를 씻으면허 회계결산을 하였다. 한해농사의 정확한 셈을 가렸으며, 악기보수, 마을 대동살림해결, 마을대소공사 등 노력동원에 대한 결산과 노동의 피로를 풀어내는 놀이가 함께 어우러졌다. 지역에 따라서는 우물 정비도 이루어졌다.


회의명은 호미걸이, 호미씻이, 두레먹기, 두레결산, 두레셈보기, 두레셈, 회계하기, 심보는 모임, 결산모임, 두레공사, 질먹기 등 다양하다. 회의 장소는 무더운 여름이라 시원한 동구나무 밑, 산중턱 따위가 이용되었다. 마을 공터나 야산 숲그늘 같이 전망 좋고 시원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간혹 두레 도가집에서 회의를 하기도 했다. 대게 낮에 회의를 했으나 마을에 따라서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심야회의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호남지역에서는 모정도 결산모임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농청이나 모정이나 전형적인 조선 후기 풍습이 이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회의 시기는 두레농사 전의 회의가 상당히 중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반하여 대게 칠월칠석이나 백중날 혹은 그날을 전후하여 이루어졌다. 7월 초순부터 대략 7월 중순 무렵에는 두레먹기가 완전히 끝이 났다.

김포지역의 세시풍속


세시풍속이란 1년을 주기로 계절에 따라 일정한 시기에 되풀이되는 주기전승적인 의례행위로 흔히 연중행사라고도 한다. 세시풍속을 안 가진 민족은 없겠지만 특히 식물 재배의 농경문화를 기본으로 하는 우리민족에게는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농경 중에서도 까다롭고 어려웠던 벼농사는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풍속을 이룬 데다가 4계절의 변화가 뚜렷한 우리나라는 더욱 개성적인 풍속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의 역사가 매우 오래된 것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상한의 춘추농경의례등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세시풍속은 크게 생산적인 것과 신앙적 의례로 형성되었다. 이것은 4계절과 월별에 따라 독특한 풍속이 형성되었는데 특히 생산적 활동 즉 농사의 준비, 파종, 제초, 수확, 저장 등과 관련되어 계절적 변화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농사를 짓는 데 적시를 잘 파악하여 시기를 놓치지 않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하에 1년간의 농업노동의 과정과 중간중간의 휴식 일정이 지역의 풍토에 알맞게 형성되었는데 연초에는 풍년을 위해서, 파종기에는 성숙을 위해서, 수확기에는 추수의 감사를 위한 신앙적 의례가 곁들여졌다. 이러한 행사는 힘들고 고생스러운 농민들에게 휴식의 기회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내일의 노동을 위한 활력을 불어넣는 기회가 되기도 했으며, 한겨레로서의 결속과 일체감을 강화하는 계기도 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행사 중 전민족의 큰 공감대를 이루어 성행된 것이 명절로서 대표적인 것이 설, 대보름, 한식, 추석이고 그 밖에 삼짇날(삼월삼일), 사월 초파일(연등절), 단오, 칠석, 중앙절, 동지 등이 있다. 


김포지역도 이러한 명절을 지낸것은 다른 비장과 크게 다를것이 없으나 차이가 있다면 이들의 성행도와 내용상의 차이가 나타난다는 점이다. 김포지역 세시풍속은 북부/남부/중부권의 세시풍속 중 중부권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김포는 지리적으로 서울의 서북단에 접경한 넓은 평야를 이룬 내륙지역으로 순수한 농경문화가 발전하였던 지역이다. 서울과 인접해있는 데다가 교통이 편리하여 한국 문화의 중심인 서울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지역으로, 한국의 전통문화를 많이 전승하던 곳이었으나 최근에는 서울이 서구문화 유입의 관문이 되어 지방의 전통문화가 퇴색되고 소멸된 경우가 많다.


역사적으로 김포는 처음에는 백제에 속했었으나 고구려 신라의 세력이 자주 교차되었던 곳이기 때문에 삼국의 풍속이 고르게 배합된 중부문화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한강 남쪽에 위치하여 북부보다 남부권의 문화적 특성이 더 짙은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 대표적인 특성으로 단오보다는 한식의식이 더욱 성행했고, 설날차례음식에 만두가 전혀 없는 떡국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중부권 특히 경기도와 충청도에 서 성행하던 '거북놀이'와 '사자놀이', '소놀이' 등이 거의 행해지지 않는 점도 특이하다.


그러나, 이러한 세시풍속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소멸, 생성되면서 변화되기 마련인데 가장 큰 분기점은 한국전쟁이다. 그 후 교통과 통신, 매스컴의 발달은 서구문화의 홍수적 유입을 초래했고, 그것은 한국의 전통문화에 큰 변혁을 가져오게되었다. 이에 따라 생활문화의 양식도 산업화에 의한 도시민적 생활양식으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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