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의 조직과 회의
조직과 회의는 두레를 가능케하는 원동력이었다. 민주적인 조직관행과 회의방식은 두레의 평등성을 보장하였으며, 두레가 마을에서 강력한 힘을 지니게 하는 기반이 되었다. 두레는 자연마을을 기반으로 조직하였다. 자연마을에서 1개의 두레가 조직되는 것이 보편적이므로, 두레발생이 촌락의 발달과 더불어 나왔다는 결정적 증거가 되고있다. 두레의 노동력 동원방식은 강제성을 지녔다. 강제성은 두레의 공동체성을 뜻하였고, 강제성이 약화되면서 두레도 사라졌다. 두레는 민주적인 회의체로서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두레를 하기전에 열리는 사전회의와 두레가 끝나고서 열리는 결산회의가 있었다.
1) 두레의 조직
두레 조직권역 기본형은 자연마을 단위이며, 이의 확장형은 여러마을이 묶인 형태의 합두레다. 현지조사 자료에 의하면, 거개의 마을두레들이 1개 자연마을을 단위로 하는 자기 완결적인 조직관성을 지닌다. 여기서 조선후기의 리,동,촌의 정황을 두레조직에 비추어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 처음 형성된 자연마을의 경우, 마을 규모가 작았기에 이웃마을과 합하여 두레를 형성하였을 것이나 인구증가에 따라 차츰 자연촌의 확대발전이 이루어짐으로써 자연마을 단위로 독자적인 조직화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자연마을을 벗어나서 지역적인 연합체로 결성하는 경우는 드물다. 두레는 원칙적으로 1개 자연마을 단위로 조직되는 것이 상례인 탓이다. 합두레로 작업을 하는 경우에도, 각각 마을마다 소규모 두레를 자체적으로 조직하고 있는 것이 상례이며, 합두레시에도 각자 마을두레가 대열을 지어 작업을 하고 난 다음 다시금 각자 마을 두레로 돌아가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 경우에 합두레는 연인원 100명 이상의 대규모 조직을 의미했다.
마을이 지나치게 커서 1개의 단독두레로 묶을 경우, 능률이 오르지 않을 것을 대비하여 몇 개의 두레로 나누어 짠다. 소규모 두레로 나누어 작업을 하면 보다 효과적이라고 판단될 경우에 해당되며, 마을에 따라서는 두레꾼 숫자가 많더라고 한번에 두레를 내는 경우도 많다.
2) 두레의 회의
(1) 두레농사 전의 회의
두레농사 전의 회의는 실제적 농사준비를 시작하는 예비모임이다. 무엇보다 두레 재조직 및 역원선출, 경지순서 결정, 두레셈 기본원칙, 농악기 보수 및 구입, 악기연습 따위가 이루어졌다. 볏가리 뉘이기, 농가고사 따위의 의례와 놀이가 곁들여졌다.
회의명칭은 '두레공론', '두레공사', '김매기모임', '김매기회의', '두레짜기', '질짜기' 등 다양하다. 현지조사에 의하면, 두레짜기가 보편적이다. 그러나 두레짜기 같은 관용어 성격의 명칭뿐 아니라 두레공론, 두레공사 따위도 명칭으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회의 장소는 시기에 따라 다소 달랐는데 모내기 이후의 더운 철에 열리는 회의는 시원한 나무그늘(정자나무)이 쓰였다. 마을의 유력한 집의 큰 사랑방도 악기보관, 집회장소 따위로 활용되었으며 일제시대로 들어와서 행정책인 구장집도 모임처로 활용되었다.
(2) 두레농사 후의 회의
두레농사 후에 하는 회의는 결산모임이다. 김매기를 종료하고, 음력 칠월 칠석이나 백중을 전후하여 호미를 씻으면허 회계결산을 하였다. 한해농사의 정확한 셈을 가렸으며, 악기보수, 마을 대동살림해결, 마을대소공사 등 노력동원에 대한 결산과 노동의 피로를 풀어내는 놀이가 함께 어우러졌다. 지역에 따라서는 우물 정비도 이루어졌다.
회의명은 호미걸이, 호미씻이, 두레먹기, 두레결산, 두레셈보기, 두레셈, 회계하기, 심보는 모임, 결산모임, 두레공사, 질먹기 등 다양하다. 회의 장소는 무더운 여름이라 시원한 동구나무 밑, 산중턱 따위가 이용되었다. 마을 공터나 야산 숲그늘 같이 전망 좋고 시원한 장소에서 이루어졌다. 간혹 두레 도가집에서 회의를 하기도 했다. 대게 낮에 회의를 했으나 마을에 따라서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심야회의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호남지역에서는 모정도 결산모임에서 대단히 중요했다. 농청이나 모정이나 전형적인 조선 후기 풍습이 이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회의 시기는 두레농사 전의 회의가 상당히 중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에 반하여 대게 칠월칠석이나 백중날 혹은 그날을 전후하여 이루어졌다. 7월 초순부터 대략 7월 중순 무렵에는 두레먹기가 완전히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