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진두레놀이] 두레의 공동체 잔재론에 대한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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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생산력발전의 성과는 씨족성원들의 단합된 힘과 공동체적 사회관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여기서 공동노동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생산방식이었다. 혈연중심의 집단생산활동,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 생산물의 공동분배에 기초한 원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서 농경 기원문제와 연관지어 보면 이미 기원전 2천 년 후반기에 벼가 재배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고, 늦어도 기원전 1천년기 후반에는 벼농사가 정착되기 시작하여 차츰 잡곡농사보다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것으로 나타난다. 보습 괭이· 곰배괭이· 낫· 반월형 석도· 삼각형 석도 등이 출토되었으며, 후기 청동기와 초기 철기시대에 접어들면 농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농기구의 개선은 농업생산을 비롯한 여러 가지 생산활동을 더욱 넓혀 물질적 부의 생산을 훨씬 강화시켜 나갔을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공동노동의 역사는 상당히 소급된다. 어느 시기에나 공동노동은 존재했다. 각 시기마다 있었던 공동노동은 원시 공동체형 공동노동, 고대형, 중세 및 근세형으로 나눌 수 있다. 문제는 모든 공동노동이 두레는 아니므로, 두레가 어느 시기에 발생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고대 사회 두레 발생론을 제기할 수 있다.
선사시대에 공동노동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생산방식이었다. 그러나 계급분화가 싹트고 정착한 시기에 이르면 공동노동의 성격도 변냈다. 더 이상 원시 공동체 사회가 존림할 수 없게끔 사회적 토대가 바뀌었다. 삼국지에 벼농사를 했던 증거가 곳곳에서 보이는 것으로 보아 벼농사가 상당히 중시되었던 사회로 보인다.
진한에서 5월에 파종하고 축제를 열었다는 말은 분명 농업생산과 깊은 관계가 있다. 이제 원시공동체사회는 과도기를 끝내고 새로운 계급관계에 기초한 고대사회 노동방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문헌기록이 보다 분명해지는 삼국시대로 내려오면 공동노동의 사례도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 시기에 공동노동이 있었을 것은 틀림 없는 사실이며, 공동노동이란 측면에서나 본다면 두레의 시초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시기의 공동노동은 고대국가의 일반적 특징인 경제외적 강제에 기초한 노력동원적 성격이 강하였으므로 고대사회의 노동이 그대로 근대형 두레의 원천이 된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더욱이 고대사회 두레 기원설을 그대로 인정한다면, 두레의 공동체 잔재설을 용인하는 꼴이다.
문제의 핵심은 두레를 공동체 잔재로 보는가, 아니면 새로은 의미에서의 공동체 문화로 보아야 하는 가에 있으며, 두레의 성격을 밝히는 기준이 된다.
공동체 잔재론은 여러 사람들에 의해 제기되었다. 마을 공동체가 원시공동체의 최후의 단계인 농업공동체와 결부되어 원시사회의 말기부터 존재하였다고 보는 원시 공동체 잔재론이 그것이다. 그 원인으로 봉건제에서 고립적 마을민들의 자연경제에 입각한 지극히 완만한 생산력 발전, 낡은 공동체적 생활인습과 전통이 가지는 완강한 생활력, 그리고 그의 적응능력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대외적으로는 공동체 시기와 같이 배타적이며 전투적 성격을 띠게 되었으며, 대내적으로는 봉쇄적이며 상호 부조적이 성격을 계속 유지하였다고 본다. 따라서 두레를 원시 공동체의 청년집회소에서 분화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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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의 발생으로부터 소멸에 이르는 두레의 역사적 기원과 그 변천과정을 통하여 두레의 성격이 잘 드러날 것이다.
두레의 형성 시기를 정확히 알려 주는 문헌자료는 없다. 그러나 두레 형성에 관한 두가지 요인을 제시할 수 있다. 첫째는 조선후기 이앙법 확산으로 두레가 정착되었다는 견해다. 둘째는, 향촌사회에서 자연촌의 성장과 촌계의 분리독립에 따른 두레 발생의 사회적 여건 조성이란 시각이다.
두레의 원형은 이미 고대사회의 공동노동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근대사회에 이르기까지 전승된 두레의 원형은 조선 후기의 산물로 인정된다. 따라서 두레의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공동체 잔재설은 배제되어야 하며, 근대문화의 소산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두레는 생산조직에 그치지 않았다. 두레는 조선 후기 변혁운동에서도 일정안 역할을 담당했다. 특히 19세기 향촌사회변화와 두레의 농민 운동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두레가 한국사에서 수행한 몫이 분명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 같은 두레가 일제시대에 소멸했다. 화폐경제의 일반화와 일제의 식민통지는 두레의 존립 근거를 박탈하였다. 두레의 소멸은 풍물과 노동요의 급격한 쇠퇴, 마을 공동체적 생활기풍의 축소를 가져왔다. 조선후기 농민들이 이룩한 뛰어난 두레문화는 내재적인 발전을 차단당하고 완전히 사라졌다.
여말선초에 이르러 향도가 분화되면서 향촌사회도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향도의 공동 노동조직이었을 가능성이 높은 향도는 두레의 선행조직으로 간주된다. 또한, 두레의 발생은 조선 후기 촌계의 발달에 힘입었다. 따라서 향도의 분화, 촌계의 발달, 이양법의 확산, 향도 노동조직의 잔존 따위와 두레의 연관성을 규명함은 곧 두레의 변천사를 밝힘과 같다.
인류가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을 개조하며, 사회를 발전시켜나가는 데서 결정적 요인으로 된 것은 창조적 노동이었다. 사람은 노동을 통해서만 의식주를 해결하고, 그로 인하여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하였다. 따라서 인류 역사를 노동의 역사로 환치시켜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인류 초기의 사회적 결합은 아직 견고하지 못하였으며 보다 자연의 힘에 의존하고 있었다. 원인단계의 원시인들은 매우 원시적인 사회생활형태를 띤 집단체였고, 여기서는 노동의 분업이나 차등이 없었다. 선사시대 노동의 특징은 집단성에 있었다. 그러나 차츰 자기집단에 대한 관념이 생겨났으며, 사냥 등의 집단적 노동과 자연적 분업의 발생, 일정한 거주지역에서의 공동생활, 생활에서 필수품이었던 불의 공동관리 등은 사회적 연계를 훨씬 긴밀하게 하였다.
고고학적 성과들은 이미 기원전 3천년경에 발전된 신석기시대의 생산력 수준을 말하여 주고 있다. 무엇보다 농업의 시작, 이는 사람이 자연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연에 대한 지배능력을 확대하여 나가는 긴 역사과정에서의 새롭고도 중요한 전진이었다. 농경문명은 인류의 정신세계와 물질문화를 더욱 풍무하게 하였으며, 나아가 사회관계와 생활양식에서 큰 변화를 초래하였다.
신석기시대 생산력 발전의 성과는 씨족성원들의 단합된 힘과 공동체적 사회관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여기서 공동노동은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생산방식이었다. 혈연중심의 집단생산활동, 생산수단에 대한 공동소유, 생산물의 공동분배에 기초한 원시 공동체 사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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