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의 소멸 시기 및 양상


두레의 소멸시기와 그 양상

190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 초기무렵 조선 사회는 화폐경제체제로의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었다. 마을 공동체의 약화는 두레의 존립을 어렵게하고 이 과정에서 두레는 점차 소멸하다가 일제 말기를 지나며 거의 완전하게 소멸이 된다. 1940년대부터 1950년대 까지 약 10년간에 8할 이상에 해당하는 두레가 소멸되었다고 한다. 나머지 약 20%정도의 두레는 그 명맥으 이어오다가 이농 및 제초제 등장을 기점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두레 소멸의 원인

두레 소멸의 원인은 크게 8가지 정도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두레를 통해 자연스럽게 결집하는 민중들을 억압하고자 일제가 두레 소멸을 주도하였다. 둘째, 일제 말기 징병, 징용제가 실시되면서 농촌에 일할 사람들이 점차 사라졌다. 셋째, 일제 말기 악기 공출로 풍물이 희귀해졌다. 넷째, 일제 말기 공동작업반 운영으로 두레의 필요성이 감소했다. 다섯째, 진흥회가 두레의 자율성을 악화시켰다. 여섯째, 한국 전쟁으로 농촌이 점차 파괴되고 인구가 피난 등으로 이동하면서 공동체가 약화되고 인심이 각박해져 두레 문화를 약화하였다. 일곱째, 190년대 이후 이농으로 인해 농촌에 젊은 사람들이 희귀해지면서 노동력이 약화되었다. 여덟번째, 1970년대에 들어와 제초제가 보급화되면서 두레가 소멸했다.


이러한 원인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일제 말기의 전쟁준비, 한국전쟁으로 인한 격동, 산업화 등으로 인한 이농과 농약사용 등이 두레의 소멸을 가속화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공동체성의 약화가 두레를 소멸하는데 가장 큰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레 소멸의 영향 및 결과

두레의 소멸은 무엇보다 노동과 놀이의 소외라는 비인간화로 나타난다. 노동의 신성성이나 그 상징성이 와해되며 집단문화의식도 약화되었다. 노동주체의 자기노동에 대한 긍정, 자긍심 등은 생산력의 발전의 질적 요인이었고 또 노동집단의 집단적 상징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징적 의미의 소멸은 노동 주체들의 공동체성을 와해시켰을 뿐만 아니라 노동행위 자체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두레 소멸 이후 더 이상 공동체적 의식에 기반한 집단노동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또한 이는 문화적 소외현상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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